자생 엉겅퀴 잎 추출물의

항산화효과 및 생리활성



Antioxidative and Physiological Activities of

Cirsium Japonicum var. ussuriense Leaf

Extract








대부분의 호기성 생물체는

산소를 이용하여 에너지 대사를 하며

대사과정에서 발생하는

활성산소의 상해에 대해

여러 자기방어 기구를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조직의 방어능을 초과하는

활성산소의 생성은

성인병이라 불리어지는

관절염, 순환기장애 뿐만 아니라

치매 등과 같은 여러 질환읜 원인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Halliwell B 1991, Fukuzawa K 등 1990




유해산소라고도 불리는 활성산소는

가장 안정한 형태의 산소인

삼중항 산소 (³O₂)가 산화-환원과정에서

환원되어 생성되는 일중항산소인

superoxide anion 라디칼(·O₂­­-)이나

과산화수소(H₂O₂) 및

hydroxyl 라디칼(·OH)처럼 짝짓지 않은

상태의 전자를 갖는

프리 라디칼(free radical)들로서,


이들은 단백질, DNA, 효소 및 T세포와 같은

면역체계에 관여하는 세포 혹은 인자들을

손상시켜 여러 가지 질환을 일으킨다


*참고문헌

Regnstrom J 등 1922, Gey K 등 1911, Abuja PM 등 2001,

Kroemer G 등 1955, Marnett LJ 2000, Rice-Evans CA 등 1993,

Shigenaga MK 등 1994, Ames BN 1989, Esterbauer H 등 1990,

Dizdaroglu M 등 1990, Fedtke N 등 1990, Johnson TM 등 1996




때문에 활성산소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항산화제의 개발 연구가 진행되어

superoxide dismutase(SOD),

catalase, glutathione peroxidase 등과 같은 항산화효소와

vitamin E, vitamin C, carotenoid, glutathione,

β-carotene, astaxanthin 및  합성 항산화제인 t-Butyl-4-hydroxyani

sole(BHA),  3,5-(t-Butyl)-4-hydroxy toluene(BHT) 등


여러 가지 항산화제가 알려졌으나,

항산화 효소는 단백질로 구성되어

온도나 pH에 심한 영향을 받아 산업적으로 응용하기 어렵고

 합성 항산화제 경우에는 변이원성 및 독성이 지적되면서

보다 안정하면서 효능이 높은 천연 항산화제의 개발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Kitahara K 등 1992, Hatano T 1995, Masaki H 등 1995,

Cort WM 1974, Branen AL 1975




대학시절 국내 엉겅퀴에 대한

항산화 실험을 통해

미래 항상화제 개발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


국내 자생 엉겅퀴의

잎, 줄기, 뿌리 중에서

잎 부분의 항산화실험을 진행하였으며

여러 실험결과를 공유하려 한다.






이제까지 내가 적은

사도바울의 신비주의에 관한

5가지 글은 14의 내용일 뿐이다.

즉, 이 책의 극히 일부분이다.


내용이 내용인지 복잡하고

다소 어려운 용어와

잘 이해되지 않는 문법으로 인해

읽는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던 경험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러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마무리를 통해

사도바울의 신비주의는 끝내려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종말론적 세계관과

전반적인 사도바울의 사상

그리고 슈바이처가

바울의 불후의 유산이라고 말한

"생각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사도바울의 사상은 책에 나와있기에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지만

종말론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먼저, 사도바울의 사상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리스도와의 공동이다.

다른 신-신비주의와 같이

무한자와 합일되는,

우리와 같은 사람(유한자)라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

즉,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공동이 되는 그리스도-신비주의 이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공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생각함에 관한 내 생각이다.

생각함이 없이 받아들인다면 고인 물과 같다.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며 믿는 것은 좋지만

이에 대해서 내 상황가 맞게

생각하고 음미할 때

새로운 믿음이 생겨날 것이다


물론, 이로인해 잘못된 해석이나

판단이 생길 수 있다

때문에 이런 "생각함"은

바울의 믿음과 윤리에 안에서

생각하는 "생각함"이어야 할 것이다.


즉, "생각함"이란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신의 세계관에 국한되어야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계와 세계관은 변화하고 새로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받아들이기만 하는

그리스도 공동체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정체된 종교의 결말은 뻔하다.

이를 해결해주는 것이 바울의 유산

곧 "생각함"이고 때문에 슈바이처는

바울의 불후의 유산을 "생각함"이라 말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세계관이다.

구속이란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아의 도래 안에 존재한다는

복음적-원시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미래적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대한 믿음 안에서

도래하는 나라를 끝까지 생각하되

자신이 처했던 시간적 제약성을 뛰어넘어

모든 시대에 대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표현"을

바울은 생각해 내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의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현재의 미래가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옛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이라 함은

세상이 외적으로 변화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도래하여

자신들이 구속받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 뒤에도

그들이 생각했던 세상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의 신비주의는

그들의 종말론적 세계관이 가져온

문제를 해결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종말론을 포기하지 않고

종말론을 넘어섰다.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초기의 구약의 예언들을 봐도

야훼의 날(구약에선 이렇게 표현하고 했다.)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종말이 아니었다.


물론 후대로 가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기는 했지만

이는 야훼가 일으키시는 다양한 구원 행동의 하나일 뿐이었다.

사실 종말을 그렇게 생각한 이유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과 멸시 때문에

하나의 돌파구로서 생각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종말은 신약성서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도 엿볼 수 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을 때도

세상의 종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종말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말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을

생각하고 기다렸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실 구약 신약 성서 어느 것 하나만

좁은 시야로 본다면

그리고 "생각함" 없이 들여다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 라거나

"너희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

이라는 구절로 인하여 혼란이 올 수 있다.


때문에 성경이란 것은

어느 성서 하나만 가지고 전체를 파악하기 보다는

전체적이고 큰 범위 안에서

그 원리를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래야 바울의 신비주의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슈바이처는

그리스적 그리스도교 교리

카톨릭 교회의 교리

개신교 교리


이 모든 교리가

바울의 복음을 간직하지만

바울과 같이 예수의 복음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하는 이해의 틀 안에서

간직하고 있고

이것은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복음 계속은

오직 순수한 원시 그리스도교적-종말론적

바울주의라고 일축한다.


이러한 바울주의가 예수의 죽음 이후 시기에

적합한 형태로 나타난 예수의 복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냐 바울이냐 라는 질문은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에 바울주의와 예수의 복음이

대립 관계에 들어가게 됨으로서

순수하지 못한 바울인

동방 그리스도교와

불완전한 바울인

서방 그리스도교로 나뉘며


이로 인해 하나님-나라-경건이

구속-경건에 의해 억제되게 되었다.


개신교과 다시

하나님-나라-경건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기존의 카톨릭적-바울적 구속론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창의에 관한 바울적 가르침이라는

협로에 빠져들게 된다.


더 나아가서 개신교에서 대두되는

하나님-나라-믿음은

바울적으로 규정된 구속론과

자신을 결합시키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바울의 복음을

예수의 복음으로 밀쳐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그리스도와의 공동이라는

바울의 신비주의가 해결해줄 수 있다.


예수의 복음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단순한 전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획득을 약속하며

주어진 구속을

예수와의 공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은

이런 바울의 신비주의적 구속 가르침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바울의 윤리 안에는

예수의 복음 윤리가

그 생명을 지속시키고 있다.


예수의 윤리는 바울에게 있어

예수와의 공동 가운데서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 안으로의

구속된 존재의 윤리가 된다.


바울의 윤리는

종말론적 기대 의존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나라의 실현이 시작되었다는

확신과 결합한다.


슈바이처는 바울의 사고가 지닌

위력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1. 바울의 사고가 지니는 깊이가 매우 깊고

   높은 사실성을 지니고 있다.

2. 원시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불이

   바울에게서 타오르고 우리의 믿음 속으로

   옮겨 붇는다

3. 그리스도에게서 갖게 되는 체험이

   바울에게서 우러나오며

   우리를 동일한 체험의 길로 낚아챈다.


바울은 우리를

구속의 사실적인 길로 이끌어간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넘겨준다.


슈바이처가 원래 이렇게 쓴건지

번역이 너무 어렵게 된건지

사실 알아듣기가 힘든게 사실이다.

한글이 맞나.. 싶을정도로..


내 나름으로 정리하자면

바울 생전에는 "창의적"으로

예수의 복음을 계속해왔다.


바울의 사고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예수의 복음이 살아 움직이면서

태동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했지만


바울의 죽음 이후

이것을 계속할 만한 (바울만한)

존재의 부재로 인해

불완전하고 순수하지 못한

교리들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를 통해

다시금 사도바울이 말한

사상가의 존재의 중요성이 생각났다.


본래 바울은 하나님-나라-경건을 말했지만

어느새 하나님과 나라는 빠지고

(부활 승천 나라에 대한 믿음은 제외되고)

단순히 구속과 경건만이 남아버렸음을

슈바이처는 경고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교리들이 지닌

단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바울 본래의 윤리와 복음 뿐이라고

슈바이처는 생각하고 있으며


바울의 사고의 위력 3가지를 말하며

여러 학파, 교리들에 대해 깨달음을

촉구하고 싶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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