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는

그리스적 그리스도교 교리

카톨릭 교회의 교리

개신교 교리


이 모든 교리가

바울의 복음을 간직하지만

바울과 같이 예수의 복음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하는 이해의 틀 안에서

간직하고 있고

이것은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복음 계속은

오직 순수한 원시 그리스도교적-종말론적

바울주의라고 일축한다.


이러한 바울주의가 예수의 죽음 이후 시기에

적합한 형태로 나타난 예수의 복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냐 바울이냐 라는 질문은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에 바울주의와 예수의 복음이

대립 관계에 들어가게 됨으로서

순수하지 못한 바울인

동방 그리스도교와

불완전한 바울인

서방 그리스도교로 나뉘며


이로 인해 하나님-나라-경건이

구속-경건에 의해 억제되게 되었다.


개신교과 다시

하나님-나라-경건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기존의 카톨릭적-바울적 구속론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창의에 관한 바울적 가르침이라는

협로에 빠져들게 된다.


더 나아가서 개신교에서 대두되는

하나님-나라-믿음은

바울적으로 규정된 구속론과

자신을 결합시키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바울의 복음을

예수의 복음으로 밀쳐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그리스도와의 공동이라는

바울의 신비주의가 해결해줄 수 있다.


예수의 복음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단순한 전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획득을 약속하며

주어진 구속을

예수와의 공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은

이런 바울의 신비주의적 구속 가르침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바울의 윤리 안에는

예수의 복음 윤리가

그 생명을 지속시키고 있다.


예수의 윤리는 바울에게 있어

예수와의 공동 가운데서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 안으로의

구속된 존재의 윤리가 된다.


바울의 윤리는

종말론적 기대 의존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나라의 실현이 시작되었다는

확신과 결합한다.


슈바이처는 바울의 사고가 지닌

위력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1. 바울의 사고가 지니는 깊이가 매우 깊고

   높은 사실성을 지니고 있다.

2. 원시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불이

   바울에게서 타오르고 우리의 믿음 속으로

   옮겨 붇는다

3. 그리스도에게서 갖게 되는 체험이

   바울에게서 우러나오며

   우리를 동일한 체험의 길로 낚아챈다.


바울은 우리를

구속의 사실적인 길로 이끌어간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넘겨준다.


슈바이처가 원래 이렇게 쓴건지

번역이 너무 어렵게 된건지

사실 알아듣기가 힘든게 사실이다.

한글이 맞나.. 싶을정도로..


내 나름으로 정리하자면

바울 생전에는 "창의적"으로

예수의 복음을 계속해왔다.


바울의 사고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예수의 복음이 살아 움직이면서

태동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했지만


바울의 죽음 이후

이것을 계속할 만한 (바울만한)

존재의 부재로 인해

불완전하고 순수하지 못한

교리들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를 통해

다시금 사도바울이 말한

사상가의 존재의 중요성이 생각났다.


본래 바울은 하나님-나라-경건을 말했지만

어느새 하나님과 나라는 빠지고

(부활 승천 나라에 대한 믿음은 제외되고)

단순히 구속과 경건만이 남아버렸음을

슈바이처는 경고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교리들이 지닌

단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바울 본래의 윤리와 복음 뿐이라고

슈바이처는 생각하고 있으며


바울의 사고의 위력 3가지를 말하며

여러 학파, 교리들에 대해 깨달음을

촉구하고 싶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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