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다는 사상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안에

가지고 있다.


전에 말했듯

죽음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서

구속과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바울의 신비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우리 안에서 현실이 되어 있는 경우에만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진실이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써 현실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며

이것이 바로 바울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영에 관한 가르침은

바울 자신이 속한 당시의 세계관과

현재 우리의 세계관을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해준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음으로

생겨났던 문제를 해결했고

그 해결책은 우리의 현재

나아가 앞으로의 미래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통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을

초지상적인 것들의 모든 광채가

지상적인 것 안에서 가시화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 광채들을 광도(밝음의 정도)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펼치는 영향력에 따라 평가한다.


눈에 띄지 않는 영의 윤리적 입증을

최고로 내세우며,

사랑을 영원한 것 그 자체가

시간적인 것 안에서

현실이 되는 은사로 인식한다


마지막으로 슈바이처는

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에 대하여 언급한다


슈바이처는 바울의 하나님-나라-경건 안에서

우리의 경건히 새롭게 되어야 하며

하나님-나라-일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죽음과 부활을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먼저 선행된 뒤

우리의 경건과 행동과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 같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이

그 나라의 실현을 어떤 조치로부터

기대할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만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지배로부터

기대해야 한다고 한다.


예수인가? 바울인가

혹은

예수와 바울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슈바이처는


바울이 복음을 예수의 말로 반복하거나

예수의 복음을 하나의 증인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복음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다만, 바울은 의미에 맞게

예수의 복음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 이후의 시기에

그리스도교적 믿음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예수 자신이 설파한 그대로

반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신비주의에 대해

첫 글에 적었듯

바울은 사상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바울은 그 사상가의 역할을

정확하고 제대로 해냈고

그리스도교가 현재 지금까지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바울의 사고에 대한 놀라움이 생길 뿐이다.

성경에 써진 글로는

바울이 해낸 일의 중요성이나

그 대단함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영원토록

그리스도교가 이어지게 만든 인물이

바로 바울이라 생각된다.







슈바이처는 앞서

그리스도-신비주의를 언급한 이후

하나님 나라 믿음과

구속 믿음의 통일성을 언급한다.


종말론적 기대(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성취되지 않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커다란 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죽음과 부활을 통한 그의 공동을 통해

자연적인 세계 시간 안에서

하나님 나라 안에 있게 될

초지상적인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구속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바울이 종말론적 세계관이라는 소재 안에서

생각하는 구속 표상이 가진

근본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적-원시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구속이란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의 도래 안에 존재한다는 믿음)

미래의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앞으로 도래할 나라를 끝까지 생각하되

자신이 처했던 시간적 제약성을

(바울의 시대에는 메시아의 도래가 없었으므로)

뛰어넘어 모든 시대에 대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표현양식을 바울이 생각해낸 것이라고

슈바이처는 말한다.


이러한 표현 양식이 바로

그리스도 신비주의이며 바울의 신비주의이다


바울의 신비주의 안에서

원시 그리스도교적 믿음은

동일한 것의 본질적인 것,

곧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표상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과 맺고 있는 내적 결합을

모든 시대에서 믿음의 소유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형태를 갖추게 된다


후에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로 인해

바울의 신비주의는 점점 상실되었으며

이로 인해 식어버린 믿음을

다시 활동시키기 위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가톨릭 교회, 개신교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의 의지를 간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것들은 불완전하다고

슈바이처는 주장한다.


종교 개혁자들이 구속-경건을

일방적으로 회복하여

그리스도와 우리 시대를 위하여

봉사한다고 믿는 모방 신학은

참된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자신에게 맞게 각색한 것일 뿐이며

이것은 바울이 추구하고 가려던 길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살아 생동하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믿음을

깊이 갖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믿음과

하나님 나라 믿음을 함께 심화시키고

양자 가운데서 그 믿음이

더욱더 굳건하게 되기 위해

씨름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시 그리스도교적 믿음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하겠지만

이러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본질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쟁취하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은 자로

이해하는 정도만큼이라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

메시아의 도래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패닉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안에서의 우리를

한데 어우름으로써



바울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재림에 대한 타당성을

존속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구속, 구원받았음을 믿는 것

그것이 바울의 신비주의라는 것을

슈바이처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전편에 이어서 적는다



슈바이처는

바울이 말한 "생각함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울이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교에

자신이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지시해준다고 생각했다.


슈바이처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공동이라는 사상을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생각하는 권리"를 가져야만 하며

이 "권리"를 통해

우리가 진실로 생동하는 정신적 진리의 심오함에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신비주의이며

이는 사상적인 인해와 체험 가운데서 실현된 신비주의

곧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와의 공동이라는 의미의

신비주의라고 말한다.


신-신비주의란 신(神)이나 절대자 등

궁극적 실재와의 직접적이고 내면적인 일치의 체험을

중시하는 철학이나 종교사상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신비주의는 당연히 그 신이나 절대자가

그리스도를 칭한다고 보면 된다.


이런 신-신비주의 또는 그리스도-신비주의는

결국 신, 즉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슈바이처는

신-신비주의는 인간 현존의 피동적 규정성만이

결과로 남게 되며, 신으로서의 상승은

무한자의 대양 속에 추락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말하면서

스토아주의¹, 스피노자², 인도사상³, 중국사상⁴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신-신비주의가 이루어지려면

창조주의 의지에 대한 신적 사랑 의지의 대립을 거쳐

그 대립을 극복해야 하지만

인간의 사고는 영원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영원한 것 안에서 가야 할 길을 알기 위해서는

이원론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신비주의는

이러한 인식 불가능한 모든 것을

그대로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놓아둔다

사랑의 의지인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살고자 하며

그 하나님 안에서 평화와 활동을 발견하는 길을 걸으면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슈바이처는 그리스도와의 공동 가운데서

우리에게 정해진 하나님과의 공동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말하며

이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공동 안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본다.


이 부분 정말 어렵다

말이 너무 어렵다

그리스도-신비주의는 신과의 합일이 아니라

공동의 개념을 가지고 있음에 반해

슈바이처가 언급한 사상들은

비우거나 신을 자연이나 우주와 같은 것을 보고

이를 이해하려고 하려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

의미가 없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분은 아직도 정확하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 글을 보게 되는 사람이 답글을 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다




1) 스토아주의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궁극적 실재의 서로 다른 면이라 주장함

최고선은 덕(德)이며, 

죄와 악의 근원은 무지와 이성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최고선으로 두었으며

행복은 모든 욕망을 끊어버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의 경지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욕정을 억제하는 생활로 이어졌다



2) 스피노자

신은 모든 자연 안에 머문다고 하는 범신론을 강조했다

때문에 무신론자나 이단의 대명사로 취급받기도 하였다

자연은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운행되는데

여기서 진정한 자유란 이성을 통하여

자연의 필연적 법칙을 인식하고

자연과 하나가 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보았다



3) 인도사상

범심론적이고 영혼불멸론적인 내세관.

윤회전생의 사상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4) 중국사상

중국사상은 현실주의적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사고가 없지는 않지만

그 형의상의 세계를 분별하는 철학으로는 부족하다

주로 도덕과 정치를 중심으로 하여

현실과 밀착된 형태의 사고가 주를 이룬다.


공학도인 내가 심심풀이로 신청했던

교양과목 삶과 철학.

처음엔 어렵고 짜증나서

이리 도망, 저리 도망만 다니다

F학점을 맞았었다


그러다가 전역 후 학점 보강을 위해

다시 재수강을 신청했는데

삶과 철학이란 과목이 새롭게 다가왔다


사도바울의 신비주의

슈바이처가 집필한

두껍고 심오한 내용의 이 책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나는 14장이 기억이 남는다


공학도에게 잠시나마

삶과 철학과 사색을 알려준

사도바울의 신비주의

내가 나름 쉽게 정리하고

그러면서 느낀 것을 여기에 적어보려고 한다.




14장. 바울의 신비주의가 지니고 있는 불후(不朽)의 것


제 14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남긴 유산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생각함의 권리를 확보주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기존 그리스도 공동체는

무엇이든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던

단순하고 수동적인 집단이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의 믿음과 행동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원이 생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즉, 각 공동체 안의 사람들이 바울로 인해

자신들이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능동적인 생각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능동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도 있지만

반대로 논쟁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었다

개개인의 생각은 전부 다르고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런 생각함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다음 세대에서도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한다.


생각함이 없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 세계관 가운데서

새롭고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가진

주체가 생겨날 수 없어질 것이고

후에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진실성이

위협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그 믿을을 깊게 생각하는 것이

바울 시대에 존재했던 종말론적 세계관의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런 대목에서

그리스도교를 교향곡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교라는 교향곡이 처음에는

믿음과 생각함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시작되었지만 후에는 화음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화음을 이룰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은

바울의 영향으로 인해서 탄생한

사상가들의 역할이라고 슈바이처는 생각한다.


사상가들은 뭐가 되었든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있고

또, 그 시대마다 세계관이라는 것이 있다.

당연히 자신들 처럼 같은 시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시대에 만연하고 팽배해 있는사상이 있다.


이런 시대와 사람들에게

예수의 영 안에서 그에 대한 믿음을

인식 시켜주는 사상가들이 있어야 한다는 게

슈바이처의 생각으로 보인다.

결국, 슈바이처도 바울의 생각에

동의를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나는 반은 맞다고 생각한다

사상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등

이런 사상가들로 인해서

의식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사상가 또한

바울과 같은 순수한 그리스도적 믿음과 열정을

지닌 사상가가 존재해야만

그리스도교가 살아있는 진리로써

다음 세대로 무탈하게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자신이 사상가라 주장하는

그 인물이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결국 사상가도 중요하지만

받아들이는 주체의 의식 수준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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